안데르센의 수많은 작품 중 <눈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동화계의 거장인 그의 작품들 중에서 덜 유명한 편에 속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을 준 이야기였다. 그 동화를 다시 읽고 싶어 인터넷을 뒤져도 아주 적은 자료만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 새끼>, <엄지 공주> 와 같이 세상에 교훈을 주는 이야기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내면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눈사람>은 어쩌면 동화로 받아들이기엔 철학적인 내용이기에 덜 회자되는 듯하다.
나의 기억 속 생략되고 생략되어 겨우 남아있는 <눈사람>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겨울, 마당에는 눈사람과 줄에 묶인 강아지가 있었다. 눈사람은 틈만 나면 집 창문을 들여다보며 난로에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강아지는 그런 눈사람에게 난로는 몸을 녹게 만들 것이라며 경고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사람은 난로에 대한 동경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눈사람은 뛰는 심장을 멈추지 못하고 몸을 바짝 창문에 붙여가며 난로를 사랑했다. 그럴수록 강아지는 더욱 크게 짖으며 눈사람을 나무랐다. 어느 날, 우연히 열린 창문으로 눈사람은 난로의 열기를 더 느낄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난로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틈도 없이 눈사람의 몸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유일한 말벗이었던 눈사람이 녹아내리자 강아지는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난로의 열기에 드디어 닿은 눈사람은 왠지 모를 해방감까지 느낀다. 그날 아침, 눈사람이 녹아내린 자리엔 부지깽이만이 꽂혀있었다. 애초에 눈사람은 난로의 부지깽이를 지지대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제서야 강아지는 눈사람이 왜 그토록 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닫게 된다. 눈사람 몸속의 부지깽이가 원래 있어야할 곳인 난로를 그리워하며 자꾸만 그곳으로 눈사람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것이 눈사람이 한 짧은 짝사랑의 결말이었다. 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왜 자신이 난로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던 눈사람은 그래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플랜더스의 개>에서 네로는 파트라슈와 죽어가는 순간에도 미소를 머금는다. 그토록 동경하던 루벤스의 그림을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평생의 숙제 같던 갈증이 해소되며 잔잔한 행복 속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동화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동성을 사랑한다. 고시원을 전전하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가수 지망생, 활활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 마지막 시합이 될 수도 있는 링 위로 오르는 복싱 선수. 얼어붙은 채로 살아갈 바엔 차라리 녹아내릴 각오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과 타협해 욕망을 외면하려 한다. 저마다 사랑하는 난로를 제쳐두고 녹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간다. 우리는 어쩌면 얼어붙은 부지깽이를 품은 채 살아가는 눈사람들이 아닐런지.
강물에서 태어나 바다로 흘러가 살아도 결국 다시 회귀하는 연어처럼, 우리 가슴 속 부지깽이는 끊임없이 꿈을 그리워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 욕구를 억누른 채로 살아가는 사람을 이 사회는 ‘이성적인 사람’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라 말하며 회유한다. 슬프지만 그런, 아무 자극이 없는 인생은 결국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잊게 만든다. 한 번쯤은 각자의 난로를 찾아 마주 앉아야 한다. 조금씩 녹아내리는 몸을 보며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것을 자극 삼아 다시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눈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삶의 가치를 얻어내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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