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9년 정월 퇴계 이황(1501~1570)은 고봉 기대승(1527~1572)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낸다. 기대승이 주변 선비들에게 이황의 유학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전해들은 이황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한 다음 그의 의견을 물은 편지였다. 둘은 이 편지를 시작으로 이후 10년간 약 10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과 칠정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얼핏 보기에 유명한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가지고 토론한 것이니 별 특별한 점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둘의 나이와 벼슬을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황과 기대승은 26살 차이로 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간격이 있다. 나이뿐만 아니라 벼슬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1558년(명종 13년) 10월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는데 대사성이란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같은 달 기대승은 문과에 급제, 권지 승문원 부정자(종9품)에 임명되었다. 오늘날로 보자면 국립대학 총장 혹은 장관급에 해당하는 높은 분이 이제 막 말단 공무원이 된 파릇파릇한 청년에게 편지를 보낸 격이다. 더구나 자신의 학식에 부족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까지. 그런데 이 말단 공무원의 답장이 기가 막히다.
“이런 식으로 고친다면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라고 이황의 이론에 대해 불만을 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쭉 설명하고는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공부에 힘쓴다면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로 끝을 맺는다.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로 자타가 공인하였고 높은 벼슬까지 겸비한 이황을 향해 말단 공무원 기대승은 거리낌 없이 그의 이론을 비판하고 공부 방법까지 논설하고 있다. 이황은 이글을 읽고 화를 냈을까? 이후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학문적 이견에 대해서만 토론하고 있을 뿐, 감정적 발언은 없다. 아니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매우 존중하고 있음을 그리고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년간 10통이다. 한 통의 편지를 쓰는데 오래 걸렸다. 답장을 받자마자 바로 반박 편지를 쓴 것이 아니다. 10년이라는 세월과 10통이라는 편지글 수자는 상대방 논리의 오류를 찾고, 자기 논리의 근거를 찾는 데에 정성을 들였다는 증거이리라.
이황은 소위 ‘갑’의 위치에 있었다. 권위와 권력으로 기대승을 내리누르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4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우리는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질’을 목도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대기업 총수, 고위직 공무원들에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점원에게 택배기사에게 아파트관리인에게 텔레마케터에게 외국인에게 행한 ‘갑질’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이에 대한 비판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극혐’, ‘~충’이라는 표현이 일상화된 지 오래다. ‘운지하다’, ‘재기하다’ 같은 도무지 영문을 모를 말까지 만들어 가면서 상대방을 공격한다. 사실 많은 이들이 이런 말을 접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했으며, 또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모범답안이 있지 않는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새것을 알 때이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아래와 같이 끝맺고 있다.
지금까지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에 대한 저의 견해는 모두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치고 그 내용을 옮겨 적어 그대(기대승)에게 전하라고 하며 이정에게 맡겼습니다만, 아직 전해지지 않은 듯하므로 지금 한 통의 글을 다시 보냅니다. 아울러 헤아려 주십시오. 근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대충 적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몸을 더욱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면서 답서를 올립니다.
경오년(1570년) 11월 7일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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